세기말의 사랑(2023):망가진 사랑을 껴안고, 우리는 살아간다.
내가 망쳐놓은 게 사랑인지, 나인지 이제도 잘 모르겠다.
1. 출연진 및 등장인물
- 영미 (이유영 분): 세기말의 불안 속에서 사랑을 고백한 후,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인물.
- 유진 (임선우 분): 도영의 아내로, 영미 앞에 나타나며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 도영 (노재원 분): 영미의 짝사랑 대상이자 유진의 남편으로, 세 여성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인물.
2. 줄거리
배경: 1999년 12월 31일, 마지막 밤
세기말, 세기초.
밀레니엄 버그와 종말론이 떠돌던 1999년 12월 31일 밤.
서울의 좁고 퀘퀘한 오피스텔 한켠, 영미(이유영)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가운데, 술기운을 빌려 도영에게 전화를 건다.
“도영 씨… 나, 사실 예전부터…”
그녀는 가슴속에 감춰뒀던 사랑을 그 밤에 쏟아낸다.
세상이 끝난다 해도 이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세상은 멀쩡히 계속되었고… 영미의 인생은 산산조각 났다.
현실의 문 앞: 2000년대 초, 교도소 앞
9개월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영미는 한겨울 찬 바람 속에서 문을 나선다.
‘공금 횡령 방조’라는 죄목. 정작 자기가 쓴 돈도 아닌데.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낯선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
유진(임선우).
도영의 아내.
“당신이… 영미 씨죠?”
“당신은 누구시죠?”
“…난 도영 씨 부인이에요.”
순간, 영미는 말문이 막힌다.
유진은 감정을 배제한 듯 차분히 말한다.
“우리… 얘기 좀 해요. 당신이 그 사람한테 했던 얘기, 나도 들어야겠어요.”
감정의 블랙홀: 세 여자의 관계
영미는 마음이 무너지고, 유진은 상처 입은 자존심을 감춘 채 영미를 직시한다.
도영은 이미 사라졌고, 남겨진 두 여자는 서로를 통해 그를 마주해야만 한다.
“당신… 그 사람 진짜 사랑했어요?”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사람이었어요.”
두 여자의 대화는 적대와 공감, 질투와 연민을 오간다.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남자 하나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어떻게 견디고 살아남느냐’의 문제다.
시간은 흐르고, 감정은 머문다
영미는 자신이 망쳐놓은 과거를 되짚으며, 잃어버린 감정의 조각들을 붙인다.
유진 역시 남편의 거짓과 회피를 받아들인 후, 자신을 되찾기 위한 선택을 한다.
도영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점점 지워지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고,
두 여자는 자신들의 ‘세기말’을 보내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결말: 2000년대 초, 어느 지하 술집
영미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도영 씨는, 이제 기억도 안 나요. 근데… 이상하죠. 그 밤의 공기, 그 불안한 세기의 끝만은 아직도 선명해요.”
유진이 조용히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한다.
“그 불안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가, 사랑을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화면은 어둠 속 희미한 네온처럼 잔잔히 꺼진다.
3. 감독의 메시지
임선애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세기말의 불안과 여성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소수자와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해왔습니다.
4. 감상평
“사랑은 지나갔지만, 감정은 아직도 머물러 있다.”
『세기말에 사랑』은 1999년이라는 특수한 시간성을 배경으로, 사랑의 고백조차 타이밍을 잃은 이들의 감정 잔재를 조용히 포착한 작품이다.
세상의 끝이라 믿었던 밤에 건넨 사랑, 그 다음 날 맞이한 쓰디쓴 현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잔여들. 영화는 이 잔여에 대한 기록이다.
감독 임선애는 극적인 사건 없이도 감정이 얼마나 깊이 출렁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이유영은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선을 섬세한 시선과 호흡으로 그려내고,
임선우는 단단함과 부서짐을 동시에 품은 얼굴로 관객의 이입을 끌어낸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명확히 옳거나 틀리지” 않다.
오히려 ‘무너진 채 사랑한 사람들’의 잔해 속에서 관객은 각자의 상처를 투사하게 된다.
도영은 중심이 되지 못한 인물이고,
영미와 유진은 그 주변을 맴돌며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간다.
음악은 절제되어 있고, 미장센은 빈공간을 활용하며,
인물들은 대사를 아끼는 대신 눈빛과 정적 속에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더 잔인하고, 더 현실적이다.
『세기말에 사랑』은 단순히 실패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감정의 끝을 견디고,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