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리스의 여름(2022):땅은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살아왔고, 그러니까 떠날 수 없어.
1. 출연진 및 등장인물
- 조르디 피즈세르 (솔레): 알카라스 지역의 복숭아 농장을 지키려는 가장. 말보다 행동으로 살아온 인물로, 현실 앞에서 분노와 체념 사이를 오간다.
- 안나 오티노 (로게리아): 아내이자 어머니. 상황이 무너져도 조용히 일상을 붙들며 가족을 감싸는 정서적 중심이다.
- 마르사 (바렌티나): 막내딸. 아직 세상의 이치를 다 알지 못하지만, 변화의 공기를 감각으로 먼저 느끼는 인물.
- 키세: 사촌 언니. 반항기 어린 시선을 가진 10대. 도시로의 탈출을 꿈꾸지만,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 그녀를 묶어둔다.
2. 줄거리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 알카라스. 해마다 여름이면 솔레 가족은 대대로 경작해 온 복숭아 밭에서 수확철을 맞는다. 햇볕 아래서 흐르는 땀, 과일 상자에 담기는 복숭아, 들판을 누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모든 풍경은 이들에게 단순한 농사일이 아닌 '삶'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수십 년간 비공식적인 약속으로 경작해온 이 땅의 법적 소유주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은 복숭아밭을 정리해 태양광 발전소 부지로 개발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가족은 충격에 휩싸인다.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살았는데, 이제 와서 떠나라고요?”
하지만 계약서 한 장 없는 현실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가족의 중심인 아버지 솔레는 말없이 트랙터에 올라 일을 계속한다. 현실을 부정하고, 분노는 깊은 침묵으로 표출된다. 어머니 로게리아는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무너지는 가족의 균형을 조용히 붙든다. 딸 키세는 도시로 도망치고 싶다고 투덜대지만, 가족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어린 바렌티나는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 공기를 감지한다.
“아빠, 내년에 이 나무들은 어디로 가요?”
그 말은 이별을 예감하게 만든다.
복숭아 수확은 이어지지만 모두의 마음속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감정이 자리한다. 농사를 계속하자는 솔레의 고집과 도시의 삶을 준비하라는 자녀들의 조언이 충돌하고, 그 속에서 가족은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수확이 끝난 날. 해 질 무렵, 온 가족이 들판 가장자리에 모여 앉는다. 말없이, 햇살을 바라보며, 이 여름이 끝이라는 것을 서로 느낀다. 복숭아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침묵은 이들의 고요한 작별이다.
3. 감독의 메시지
칼라 시몬 감독은 영화 제작 당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떠올렸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단지 상상이 아니라, 내가 떠나야 했던 나의 땅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는 영화 속 땅과 인물, 공동체가 어떤 상징을 갖는지를 관객 스스로 알아가도록 설계했다. 특히 침묵과 자연음, 무대음악의 부재는 관객이 '실제로 그곳에 있는 듯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단지 알카라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소농과 지역 공동체가 직면한 생존의 이야기다.
4. 감상평
『알카라스의 여름』은 관객에게 느리지만 깊게 스며든다. 대사는 절제되어 있지만, 시선 하나, 손짓 하나가 더 많은 것을 말한다. 트랙터, 복숭아, 바람은 모두 이별을 예고하는 상징이다.
이 영화는 202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유럽 영화 평론가들은 “현대 농촌 영화의 새로운 고전”이라 불렀고, 실제 알카라스 마을 주민들도 영화를 ‘우리의 역사’라며 환영했다.
알카라스는 실제 스페인 북동부에 위치한 농촌으로, 태양광 사업과 기후 변화, 대농 중심화로 인해 소규모 농가가 줄어들고 있는 지역이다. 감독은 실제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촬영했고, 주요 배우들도 비전문 출신이다.
이 점은 영화의 자연스러운 호흡과 진정성을 배가시킨다. 스페인 내에서는 이 영화를 계기로 농지 계약 관행과 청년농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일었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이자, 반드시 기억해야 할 풍경에 대한 헌사다. 그 여름은 단지 지나간 계절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정체성이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절대 잃지 말아야 할 뿌리는 무엇인가요?”